아시아 시빅해커들에게 시빅해킹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미국 시카고 지방 정부가 공립 초등학교 통폐합을 결정했습니다. 파급력이 큰 결정이었지만 정보 공유와 의견 교환이 잘 되지 않았어요. 부모들은 분노하며 극심하게 반발했죠. 해당 정책 때문에 학생이 몇 명이나 전학을 가야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했고요. 동시에 자녀가 전학갈 만한 학교를 찾기 위해 각 학교의 평균 성적, 전학률, 평판을 조사해야 했어요. 지방 정부가 공개한 데이터는 있었지만 파편화돼 있었습니다. 학부모들이 각각 찾아보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어요.
듣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상황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개인이 해결책을 내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혼자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면 시민의 문제로 공동 대응하며 해결책을 찾아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정부나 공공기관 또는 민간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를 정제해서 정보수용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유통함으로써 문제를 완화하거나 문제의 재발을 방지하는 방법입니다. 수용자가 참여할 수 있게, 또는 다른 사람들도 그 해결책을 맞춤형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듦새를 오픈소스로 공개할 수도 있죠. 이를 시빅해킹이라고 합니다.
서두에 언급한 문제도 시빅해킹으로 얼마간 해소했어요. ‘스쿨컷츠’라는 사이트가 생겼죠. 지방 정부가 공개한 학교 데이터를 모아서 보여주는 온라인 공간이에요. 부모들 중 오픈소스와 오픈 데이터에 관심이 많은 개발자가 있어서 만들 수 있었다고 해요. 학생 45,146명과 191개 학교가 해당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는 정보부터 학교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각 학교의 전학률과 대학 진학률, 평판 정보가 보기 쉽게 실려있어요. 일부는 콘텐츠 형태여서 과거 기록을 스토리 형태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가 알려지자, 나중에는 팀을 조직해서 콘텐츠 형식으로 정보를 계속 업데이트했고 사이트의 소스코드를 공개했으며 설치 가이드도 제작했어요.
스쿨컷츠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시빅해킹은 일상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예요. 그치만 아직 거리감이 느껴지고 좀 어렵죠. 단어의 어감도 왠지 좋지 않고 뜻도 모호합니다. 그래서 답답해요. 이럴 때 답은 하나입니다. 시빅해커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지요.
다행히 기회가 있었어요. 한국의 빠띠쿱, 대만 거브제로, 일본 코드포재팬이 2019년 6월 8일~9일 이틀 동안 일본 오키나와 코자 시(Koza)의 스타트업 전용 공간 라군(Lagoon)에서 개최한 ‘Facing the Ocean Meet & Hack’ (이하 밋앤핵) 행사에 참여하게 됐죠. 아시아 시빅해커들이 각자 해결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발표했고 이틀 동안 해당 문제를 풀어가면서 토론과 발표를 하는 해커톤 또는 워크숍이었는데요. 발표자로 참여해서 ‘시빅해킹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처음에는 진행해도 괜찮을지 살짝 고민했어요. 시빅해커에게 “당신이 하는 일이 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너무 도발적인 것 같아서, 다른 주제들과 약간 성격이 달라서요. 하지만 주제 발표 후 토론 테이블을 꾸릴 때부터 일본 스타트업 마케터이자 시빅해킹 커뮤니티 오거나이저,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 코자 시 정부 관계자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고 찾아왔어요. 7명의 시빅해커도 와서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시빅해커로부터 직접 수집한 생생하고 방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보니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프로세스를 조망할 수 있었어요. 예시들을 통해서는 시빅해킹의 특징 세 가지를 뽑아낼 수 있었습니다.
진지하지만 재미있고, 기술과 관련됐지만 기술‘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그럴 수도 없거니와!), 나쁜 의미의 해킹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시빅해킹의 세계를 들여다봤어요. 차근차근 살펴볼게요.
화를 내면서(?) 시작하는 8단계 프로세스
시빅해킹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으니 과정을 통으로 살펴보면 개념에 한걸음이라도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시작하는지’ 물었습니다. 거브제로 운영진 중 한 명이자 개발자인 pm5(피엠파이브)가 친절하게 과정을 설명해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시빅해커의 답변을 받아 살을 붙였어요. 그랬더니 다음 8단계 프로세스가 도출되더군요. 첫 번째 단계는 ‘분노’였습니다.
1. 사회 및 정치 문제 때문에 화가 치밀어오른다.
2. 분노 외에 본인의 감정을 여러 단어로 정리해보고 문제를 정의한다.
3. 토론, 아이데이션, 브레인스토밍을 한다. 이를 통해 이슈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문제와 해결책을 발표/표현한다. 여기서 구상한 해결책은 완벽하지 않으니 4번 이후 과정을 거치면서 수정해 나간다.
4. 본인이 ‘해킹’할 수 있는 부분을 파악하거나 혼자 하기 어렵다면, 같은 문제에 화를 내면서 본인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5.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한다. 협업은 필수.
6. 프로토타입을 만든다. 여기에 데이터를 채우고 리스트를 만들어 스프레드 시트에 올린다.
7. 웹, 앱, 디지털 맵, SNS 계정 등 디지털 결과물을 만들어 공개한다.
8. 원한다면 오픈소스로 코드를 공유한다.
응답자들은 1번과 2번을 강조했어요. 분노와 같은 강렬한 감정이 시빅해킹을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지만 화만 내면 지치고 힘들기 때문에 본인을 먼저 다독여야 한다고요. 또 대부분 본업이 있어서 분노만 해서는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말했죠. 다음 단계에서는 답(해결책)을 내기 위해 질문(문제 정의)을 잘 구상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구체화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속도를 높이기 위해 기본적인 데이터로 디지털 결과물을 만들고 오픈합니다. 다듬는 작업은 이후에 하고요.
오픈소스는 필수는 아닙니다. 다만 사용자들이 직접 시빅해킹 결과물의 신뢰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고 코드를 열어둔대요. 나아가 같이 화내는 사람들(?)이 커스터마이징 할 때, 틀린 부분을 수정할 때,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유할 때 이를 쉽게 만들기 위해 오픈소스 하는 시빅해커도 많습니다.
7명의 시빅해커는 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시빅해킹 예시들도 공유해주었어요. 특징을 세 개로 카테고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협업, 책임, 일상 그리고 재미
1. 협업과 기여
협업과 기여는 시빅해킹의 핵심 가치입니다. 개발자가 아니라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도, 또는 특별한 기술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든 커뮤니티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1) 거브제로의 오거나이저 이사벨(Isabel)은 시빅해킹 지원금 프로그램 ‘조쏜(Jothon)’을 가장 먼저 이야기했어요. 거브제로는 2017년 조쏜을 시작했고 2019년 6월까지 2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지원했습니다. 지금도 두 달에 한번 해커톤을 열어 프로젝트를 선정해요.
조쏜은 거브제로가 내놓은 가장 의미있는 시빅해킹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어요. 2014년 대만 무역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변화도 일으킨 ‘해바라기 운동’이 일어났을 때 연쇄적으로 개최한 해커톤의 결과로 온라인 운동의 거점 거브제로를 만들 수 있었거든요. 해커톤은 협업, 조직화, 커뮤니티 노하우를 단기간에 향상시킬 수 있는 행사잖아요. 조쏜은 거브제로의 에너지를 이어받아 실질적인 결과물로 만들려는 협업의 산물인 셈이죠.
2) 이사벨은 조쏜의 지원금을 받은 프로젝트 중 하나인 ‘미국 내 대만 관련 데이터 아카이브’ 예시도 이야기해주었어요. 미국 연방 정부가 공개한 대만의 문서 및 시각 자료를 사진으로 찍어서 디지털화 하는 작업이었는데요.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한 팀은 대만 학생들을 모아서 사진을 찍게 하는 방식으로 참여와 기여를 유도했다고 해요.
3) pm5는 본인이 참여한 ‘대만어 수호 웹사이트’ 프로젝트를 예시로 들어줬어요. 한 언어학 박사가 대만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정부 정책에 분노해서 만든 사이트였습니다. 박사는 언어가 자연스럽게 생기고 사라져야 하는데, 정부 때문에 잘만 쓰던 대만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현실에 화가 났다고 해요. 하지만 본인은 기술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pm5를 만났고요. 박사의 생각에 크게 공감한 pm5는 이야기와 의미를 담아 일단 웹사이트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공개했어요. 이후 대만어를 지키고자 하는 개발자, 디자이너, 커뮤니케이터 등의 기여를 통해 정제한 웹사이트를 열 수 있었습니다.
4) 코드포재팬의 나오(Nao)는 일본 고베 지역의 ‘쓰레기 수거 시간 고지 서비스’를 소개했어요. 원래는 고베 정부가 쓰레기를 언제 수거해 가는지 알리지 않아서 주민들이 집 앞에 쌓아두어야 했는데요. 시빅해커들이 정부로부터 수집한 쓰레기 수거 시간과 장소를 활용해 웹과 앱으로 만들었어요. 정부와 시빅해킹 커뮤니티가 협업을 통해 지역 위생상태를 개선함으로써 주민의 생활을 한 단계 쾌적하게 만든 예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2. 책임감과 재미
시빅해킹은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시스템은 없으니 부족한 점,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하고 싶다는 의지를 담고 있으니까요. 진지하죠. 한편으로는 다른 시빅해커들과 공감하면서 시스템을 재정의해보고 이리저리 해체 및 조립하며 시민의 권위를 세우고 권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해킹’의 재미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거브제로의 오거나이저이자 밋앤핵 행사의 모더레이터였던 치하오(Chihao)는 이를 “‘시빅(civic)’은 진지하지만 ‘해킹(hacking)’은 쿨하다”고 표현했어요.
1) 거브제로에 기여자로 참여하는 수학자 겸 개발자 포민(Pomin)은 중국과 대만의 정치적인 대립이 심각한 수준이라면서 거브제로의 시빅해킹은 사실상 국가의 존립과 연관돼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최대한 많은 프로젝트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죠.
2) pm5는 태풍 시즌 때마다 일부 공장이 유독성 화학물질을 강에 흘려보내서 물 색깔이 적색이 되고 있다는 고발성 기사를 봤어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어서 화가 났다고 해요. pm5는 해당 내용이 담긴 과거 기사와 정보를 크롤링해 타임라인으로 정리했고 이를 오픈소스로 열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미디어에 배포했어요. 시민으로서 감시를 늦추지 않고, 나아가 미디어를 매개체 삼아 입을 연 것이죠. 좀 지났을 텐데도 이야기하면서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3) 한편 밋앤핵에 동참한 한국의 시빅해커 김슬 님은 ‘존맛국회’라는 프로젝트를 소개해주었어요. 김슬 님이 속한 시빅해킹 커뮤니티 ‘널채움’에서 진행 중인데요. 국회의원들의 후원금 사용 내역을 신청해 받아보고 이중 그들이 자주 가는 식당을 꼽아 ‘국회의원들이 자주 가는 맛집 지도’를 만든 것이에요. 현재까지 지출 상위 6명의 맛집 지도를 만들었다고 해요. 재미있죠. 누구나 데이터를 추가할 수 있어요.
4) 널채움은 이외에도 언론사의 잘못된 데이터 시각화 결과물을 잡아내어 바로잡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언론사의 웃긴 차트 가지고 놀기’인데요. 터무니없는 그래프가 기사에 실려있는 사례나 기자들이 숫자를 잘못 읽어 그래프를 잘못 그린 사례를 찾아내는 작업이에요. ‘놀기’라고 해서 재미있어 보이지만 사실 미디어를 감시하는 서릿발 같은 프로젝트입니다.
3. 일상의 문제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시민이 ‘나도 정부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효과성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인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느끼고 협업과 기여를 하면서 커뮤니티를 흥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1) 리사는 대만의 공무원들을 상대하며 커뮤니티와의 협업을 이끌어내는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녀에게 시빅해킹은 ‘일상’입니다. 정부 주요 직책에 개발자가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시민들의 니즈를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도 이를 설득하고 협업하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게 마련입니다. 또 시민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움직이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죠. 심지어 ‘디지털 장관’이 있는 대만에서도 마찬가지라네요.
2) 거브제로 윤천은 시빅해킹 자체를 민주주의로 봅니다. ‘당신에게 시빅해킹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바로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이라는 답변을 주더라고요. 더불어 시민이 정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라도 마련해주는 것이 시빅해커들의 몫이라고 전했습니다.
3) 치하오는 시빅해킹이 국가에 영향을 주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도시, 아니면 본인이 사는 동네를 바꾸면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작은 단위부터 바꿔나가면 된다는 이야기지요.
이렇게 시빅해킹을 해킹해보았어요. 아무래도 커뮤니티나 비영리단체 단위로 운영되고, 시빅해커들이 본업이 있다보니 고유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다가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라는 정의를 내릴 짬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사벨은 그래서 각국의 시빅해커들이 온라인으로 자주 만나기는 하지만 이렇게 밋앤핵처럼 오프라인 행사, 커뮤니티 행사를 열어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치하오도 ‘이 질문을 보고 시빅해킹 가이드를 한번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시빅해킹이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서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개념이라며, 그런 면에서 사람의 마음을 해킹하는 작업인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저도 밋앤핵 행사가 끝난 뒤 나름대로 한줄 정의를 내려보았어요. “시민이 겪는 모든 문제에 기술, 디자인, 협업이라는 세 가지 접근법을 사용해서 사회적으로 최대한 바람직한 해결책을 내놓고 이를 오픈소스로 공개해 참여를 유도하는 ‘문제해결 방법론’”이라고요. 정의가 어떻든 시빅해킹이 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아, 한국에도 시빅해킹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아까도 언급한 ‘널채움’이에요. 6명 정도의 멤버가 월요일마다 모여서 무리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이어간대요. 물론 누구든 참석할 수 있도록 문은 활짝 열려있어요. 이전에도 코드나무, 코드포서울 등이 있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사라졌는데요. 널채움은 한국 사회에 날카로운 시사점을 던져주는 시빅해킹 활동을 쭉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취재 및 정리 | 슬로워크 테크니컬 라이터 메이
이미지 편집 | 슬로워크 디자이너 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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